창립배경
베트멍(Vetements)은 2014년, 프랑스 파리에서 조지아(그루지야) 출신의 형제인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와 구람 바잘리아(Guram Gvasalia)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Vetements’는 프랑스어로 ‘옷(clothes)’을 뜻하며, 이 이름부터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기계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철학—즉, “옷은 옷일 뿐이다”라는 현실주의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뎀나는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 출신으로,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와 루이뷔통 등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특히 마르지엘라에서의 경험은 베트멍의 해체주의적 디자인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기존의 패션 산업이 가진 위선, 계층, 전통적인 뷰티 코드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탈피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실로서 베트멍을 구상했습니다.
당시 패션계는 여전히 명품 중심, 전통적인 테일러링, 셀럽 중심 마케팅 구조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멍은 전통을 거부하며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패션을 싫어하는 디자이너들이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통해 패션 산업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그 시작은 런웨이조차 파격적이었습니다. 첫 컬렉션은 파리의 홍등가 근처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진행되었고, 모델 역시 전문 모델 대신 일반인이나 무명 아티스트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상업화된 하이패션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베트멍의 철학은 ‘비주류의 미학’을 중심에 둡니다. 그들의 옷은 우아함이나 고급스러움을 전혀 의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커서 어색한 실루엣, 한눈에 보기엔 '촌스러운' 디테일, 그리고 다소 불쾌하거나 부조화스러운 색감의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는 의도된 디자인적 아이러니이며, 이는 단순한 반항이 아닌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베트멍은 옷을 통해 “우리의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는 점을 직시하게 만들며, ‘불편함’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미학일 수 있다는 주장을 던집니다.
창립자인 뎀나는 "패션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지를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합니다. 베트멍은 이러한 철학 아래, 사회적 풍자, 브랜드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 현대인의 소외감을 옷에 담아냅니다. DHL 로고를 넣은 티셔츠, 쇼핑백처럼
디자인 스타일
베트멍(Vetements)의 디자인은 ‘보기에 좋은 옷’이 아닌, ‘이야기를 품은 옷’을 지향합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메시지, 그리고 시대정신을 옷의 실루엣과 디테일에 투영하는 방식입니다. 창립자 뎀나 바잘리아는 기존 패션이 추구해 온 전형적인 아름다움, 즉 날씬한 몸에 딱 맞는 정제된 테일러링, 고급 원단, 완벽한 마감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에게 옷은 "사회와 인간을 말하는 언어"이며, 베트멍의 디자인은 그 언어를 가장 날것의 형태로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베트멍은 마르지엘라(Margiela)에서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 미학을 중심축으로 삼습니다. 이는 기존 옷의 구조를 분해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어색함’을 창조하는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두 벌의 바지를 수직으로 절단해 연결하거나, 셔츠의 뒷면과 앞면을 뒤섞어 입체감을 주는 방식은 해체주의의 전형입니다.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실루엣, 과장된 소매, 무너진 어깨선 등은 모두 이 해체주의 미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또한 베트멍은 옷의 기능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길게 끌리는 소매, 비정상적으로 넓은 어깨, 한쪽만 길거나 짧은 옷 등은 ‘불편함의 미학’을 전달합니다. 이는 단순히 유머나 실험이 아닌, 사회 구조의 모순과 인간의 부자연스러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20년대 들어 복고 열풍이 거세지면서, 2000년대 초반 패션, 즉 Y2K 스타일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베트멍은 이러한 Y2K의 대표적 코드들을 일찌감치 흡수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왔습니다. 로우라이즈 진, 메탈릭 컬러, 키치한 프린트, 청청 패션 등이 자주 등장하며, 이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소비자 집단의 향수를 활용한 시의적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특히 베트멍은 ‘브랜드 소비주의’를 극단적으로 패러디합니다. DHL 로고가 찍힌 티셔츠, IKEA 쇼핑백을 닮은 가방, 맥도날드풍 후드티 등은 상업 브랜드의 상징성을 빌려 소비 사회를 조롱합니다. ‘로고를 입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자, 그 패러디조차 하이패션으로 소비되는 역설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베트멍은 실제로 "우리가 가장 비싼 로고를 단 가장 싸구려 티셔츠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디자인을 다수 선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젊은 세대의 아이러니 감성과 맞물려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베트멍의 또 다른 핵심 스타일은 바로 스트리트 감성의 런웨이화입니다. 뎀나는 거리에서 직접 옷을 입은 사람들, 특히 유럽의 소도시나 동유럽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복장을 관찰하고 그 요소들을 패션쇼로 끌어옵니다. 후드티, 트랙 팬츠, 트럭커 재킷, 워크웨어, 고속도로 주유소 점퍼 등은 럭셔리 패션에서 보기 어려웠던 일상복입니다. 하지만 베트멍은 이 모든 것을 런웨이로 올려, 일상성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합니다.
베트멍의 2016 F/W 컬렉션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쇼에서는 일반인 모델, 다양한 체형의 모델이 등장했고, 사회복지사, 경비원, 마트 직원 복장을 연상케 하는 룩들이 런웨이를 장악했습니다. 이 같은 접근은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브랜드 철학과도 맞닿아 있으며, 더 나아가 ‘엘리트 중심 패션계’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베트멍은 젠더리스 디자인에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남녀 구분이 없는 오버사이즈 룩, 유니섹스 의상, 화장기 없는 모델 스타일링 등은 성별 이분법을 허무는 시도로, 현대 패션계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브랜드 전략
베트멍은 겉으로 보기에 무정부적이고 자유로운 디자인을 내세우지만, 내부적으로는 철저한 전략 기획과 시장분석을 통해 브랜드를 확장해 왔습니다. 첫 번째 전략은 ‘희소성’입니다. 베트멍의 제품은 생산 수량을 철저히 제한하고, 시즌 컬렉션도 한정 기간에만 유통되며 재생산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고객의 ‘FOMO(놓칠까 두려운 심리)’를 유도하며 높은 프리미엄을 형성합니다.
두 번째는 디지털 중심 마케팅 전략입니다. 전통 광고보다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쇼 등을 통해 타깃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며 바이럴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뎀나가 발렌시아가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베트멍은 SNS를 통해 독립된 존재감을 유지하며, ‘베트멍 유니버스’를 만들어 팬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협업, 예측 불가한 행보들은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세 번째 전략은 브랜드 철학의 일관성입니다. 베트멍은 시즌이 바뀌어도, 변하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반패션’, ‘일상성의 재해석’, ‘아이러니’라는 핵심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는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고, "이 옷을 입는 건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철학의 선택"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베트멍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자신이 하나의 ‘문화적 태도’를 구매한다고 느끼며, 이는 타 브랜드와 차별되는 결정적인 포인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격 전략 또한 독특합니다. 베트멍은 일부 제품을 매우 고가에 책정하면서도, 특정 품목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로 선보여 대중 접근성을 유지합니다. 이는 '명품 브랜드'와 '실험적 문화 브랜드'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략이며, 다양한 소비자층을 흡수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베트멍은 단순히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사회적 예술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창립 배경부터가 기존 패션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시도로 시작됐으며, 디자인은 아름다움 대신 진실과 현실을 반영합니다. 전략적으로도 베트멍은 매우 세밀하고 계획적인 브랜드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고정 팬층을 확보해 왔습니다. 현재, 베트멍은 다시 한번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Y2K의 복귀, 스트리트 감성의 확장, 그리고 소비자 개인주의의 부상은 이 브랜드가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입니다. 베트멍을 통해 우리는 패션이 단순히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닌, 사회와 개인을 연결하는 문화적 도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